DSC_1616.jpg

<작가들이 그린 자화상>나비·투명한 시선…내 마음 속 그사람

2010-08-19 09:38

글자확대 글자축소 프린트 메일로보내기 스크랩 twiter metoday

<박미진>


내 작품을 본 이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모델이 누구예요?”이다. 유난히 넓은 미간과 동그란 코가 나를 닮아서일까. 혹자는 “그림 속 인물, 작가죠?”라고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문을 해놓곤 별반 답을 기다리진 않는다. 아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모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도 미안하곤 해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가며, ‘똑같이 그렸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밤을 새가며 신명나게 작업하곤 했다.

그렇게 그린 작업을 학교 전공시간 작품과제로 내놓으면 친구들은 누굴 그린 거냐고 물어왔다. 분명 나는 점 하나, 주근깨 하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낮은 콧날을 숨김없이 그려놨는데 친구들은 낯설어 했다.

평소의 밝았던 내 모습과는 달리 어둡고 지친 내 모습을 여실히 담아낸 자화상은 동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인물화를 꽤 잘 그린다고 자부했던 나로선 충격이 컸다.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반복된 상처 이후 나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내가 인물화를 그리는 이유이며, 인물화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인물화를 볼 때면 당연히 대상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대상이 누구일까 궁금해하는 것부터 감상이 비롯된다. 

전통 동양화의 채색기법인 중채(重彩)로 현대적 감성의 인물화를 그려온 박미진의 자화상 ‘Beyond Gaze’. 한쪽 눈을 나비로 가린 작가의 애잔한 초상은 보는 이를 홀리듯 사로잡는다.

그러나 정작 작품 속 대상과 조우하면서부터는 작품 앞에서 저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인물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또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인물화 안에 그려진 인물들의 즐거움, 슬픔, 사랑, 분노 등의 감정과 마주서게 되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 그 세상 속에 속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화폭 위의 조용한 응시 속에서 나를 마주한다.

현재의 작업 ‘beyond gaze’에 이르러선 실재할 듯한 익명의 이미지에 나(我)의 모습을 오버랩시키고 있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작품 안 인물의 익명성을 내세우는 것은 앞에 있는 사람을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마음 속 사람’을 그리는 것이며 이러한 익명성은 개개인에게 가변성으로 작용한다.

그림은 이처럼 마음의 이미지를 투영시킬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닮음의 묘사가 아닌, 가끔은 예술가로 살아가는 지금 삶의 아프고 힘든 감정, 또 가끔 소소한 삶이 주는 환희의 감정, 행복과 좌절이 모두 담겨 있다.

작품 속 여인들의 머리카락을 그리며 나의 모든 감정이 붓질과 함께 바람에 흩날려질 때면 그 공간에선 나비와 같이 내 머릿속을 가득 떠다니는 무수한 물음들에 답한다. 때론 제 색을 갖고 화려하게, 때론 사라진 존재처럼 희미하게, 때론 산산히 조각난 채 작품 안에 머무는 것이다.

작품 속 여인이 더 이상 나를 닮지 않아도 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ㆍ그림=박미진(화가)>

▶박미진 작가는? 

동국대 예술대학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박미진(34)은 한국화의 ‘중채’기법으로 여성의 얼굴을 화폭 전면에 클로즈업시키는 화가다. 박미진의 싱그런 인물화는 오늘날의 감각과 꼭 맞아떨어져 미술팬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은 일견 ‘홀리는 인물화’로 불리곤 한다. 분채의 부드럽고 우아한 색감과 정교한 세필로 익명의 젊은 여성이 꿈 속을 유영하는 듯 표현한 ‘일루전’ 연작은 특히 인기다. ‘한국화의 현대적 발전을 도모할 유망주’로 꼽히는 박미진은 ‘Beyond Gaze’라는 타이틀로 어느새 여섯번째 개인전(9월 14일까지)을 신사동 가로수길의 갤러리SP(대표 이은숙)에서 열고 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